카메라 플래시에 얼음된 오리들(하천오리 시리즈141)

2019. 6. 16. 08:00동네하천에서 만난 새/집오리의 삶과 죽음 2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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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6/12) 저녁, 불현듯 오리들이 밥을 기다리며 오리섬에서 서성거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월요일 점심때 밥을 줘서 월요일 저녁, 화요일 저녁, 수요일 저녁까지 3일동안 저녁마다 밥을 기다리는 오리들을 상상하니 안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농원의 발이 제법 회복되었기에 이제 한 주에 두, 세 번 정도 밥을 주러 가려고 생각했는데...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잡곡을 챙겨 하천으로 나갔습니다.

이미 시계는 저녁 7시를 막 넘긴 참이었습니다.

요즘은 동번과 서번을 찾기가 쉽네요. 

큰다리1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으니까요. 

오리들은 밥을 주러 왔다는 것을 알아채고 서둘러 달려옵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더는 다가오지 않고 머뭇거리네요.

알고 보니 경계를 위한 거리였던 거예요. 

물가에 잡곡을 뿌려주고 멀리 떨어지니 그제서야 다가와서 잡곡을 먹습니다. 

농원이나 농투보다 동번과 서번은 우리를 훨씬 경계합니다. 

물가가 조금 내려가 있는 데다 주위에 풀이 나 있고 큰 다리의 교각이 가려져 

오리들이 쉽게 사람들 눈에 띠지 않는 곳이라 밥 주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이미 해가 기울고 있어 동번과 서번이 식사를 하도록 두고 서둘러 오리 세 식구를 향해 떠났습니다. 

평소 밥주는 시간에 비해 상당히 늦어서 (해가 지기 직전이네요.) 

농원과 야일은 어느 정도 포기하고 오리섬 1에서 떨어져 오리섬 5 근처로 내려가 있었고, 

농투만이 오리섬 1 조금 아래쪽에서 서성이고 있었습니다. 

뒤늦게 알아챈 농원과 야일이 재빠르게 헤엄쳐 옵니다. 

야일은 조금 뒤처진다 싶어서인지 잠깐 날아오네요. 

그 나는 광경을 포착해 영상에 담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농원이 근처까지 와서 잠깐 날개를 펼쳐 기지개를 켭니다. 

야일은 농원이나 농투보다 경계심이 많아서 달려오다가도 좀 거리를 더 두고 기다립니다. 

잡곡을 뿌려주는 동안 기다리면서 오리들이 "꽥꽥꽥~" 소리를 지릅니다. 

처음에는 이 소리를 '반가워'라고 해석해 보고 싶었지만, 지극히 인간적인 해석이구요,

지금은 '얼른 밥줘~'하며 조르는 소리로 듣고 있습니다. 

오리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평소대로 오리섬1을 둘러봅니다. 

초여름,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하천가의 풍경 속 오리들의 식사 광경은 언제 보아도 질리지 않는 편안함을 줍니다. 

잠시 오리들의 눈높이와 비슷하도록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시선 속의 풍경이 좀 달라보이군요. 

이날은 오리들이 모두 배가 고팠던 것 같아요. 

야일까지 끝까지 잡곡을 먹네요. 

오리들이 부지런히 식사를 하는 동안, 돌다리5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고, 큰다리2 위에는 차와 사람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오리들은 잠시도 한 곳에 머물러 식사를 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며 식사를 합니다. 

무엇보다 야일이 식사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농원과 농투를 향해 부리찌르기를 하는 통에 

오리들이 계속 둥글게 자리를 바꿔가며 식사를 하는 모습이 재미납니다. 

식사 중 부리찌르기는 공격은 아닌 것으로 보이구요, 오리들의 몸짓을 통한 의사표현 정도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내 식사를 방해하지마!'하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 

오리들의 언어에는 소리 이외에도 몸짓이 중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예를 들어 '공격'의 언어는 머리를 숙이고 앞으로 전진하는 자세를 취하거든요. 

하지만 식구끼리는 이런 공격자세를 취하는 법은 없어 보입니다. 

가족이 아닌 오리들에게 영역을 지키기 위한 몸짓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가 한삼덩굴잎을 던져주려고 다가가면서 고개를 숙이는 통에 오리들이 놀라 식사를 하다 말고 물 속으로 달아납니다. 

그런데 제가 본의 아니게 플래시를 터트려서 오리들이 '얼음'이 되었습니다. 

플래시를 껐다고 생각했는데, 또 플래시를 터트렸네요. 

이런... 세 번째 실수. 다시 플래시를 터트려서 오리들이 달아납니다. 

해가 거의 진 시간이라서 플래시가 자동으로 터지네요. 

오리들이 놀랄까봐 플래시를 터지지 않도록 무척 조심하는 편인데 이날은 실수가 많았습니다. 


오리들을 삶은 멸치로 다시 유인했습니다. 농투가 멸치를 너무 좋아하네요. 

농원은 지난 번 소염제를 묻힌 멸치의 쓴 맛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멸치 먹기를 전처럼 즐기지 않습니다. 

야일은 원래 그다지 좋아하질 않구요. 


농투만 멸치로 포식한 날이었습니다.  

오리들이 모두 떠나가버렸습니다. 

하루가 해가 졌네요. 


갑작스레 오리들에게 밥을 주러 간 거지만, 잘 했다 싶습니다. 

이날은 다른 분들이 오리들에게 밥을 충분히 주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니까요. 

오리들은 늦은 식사를 했지만, 그래도 편안한 잠자리에 들 수 있겠지요. 

저도 편안한 잠을 청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둥오리 가족이 보이질 않네요. 

다들 떠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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